천호동성당소개 찾아오시는 길 개인정보처리방침 사이트맵
HOME > 가톨릭 자료실 > 본당주보성인
성 김성우 안토니우스(Antonius, 또는 안토니오, 9월 20일)는 경기도 광주 고을 구산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부유하였고 또한 정직하고 인심 좋기로 유명하여 사람들로 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3형제 중 맏이인 안토니우스는 성격이 온화하고 관대하여 외교인 들도 그를 흠모 하였다고 한다. 그 종손들이 고향에서 존경을 받으며 사는 것은 사람들이 그 증조부의 유덕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3형제 중 두 명이 즉시 입교하였고, 오래지 않아 셋째 뿐 아니라 여러 친척과 친구와 이웃이 그들과 뜻을 같이 하여 이 작은 마을이 열렬한 교우촌이 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어머니가 별세한 뒤 안토니우스는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에 오자 성사를 자주 받기 위해 서울로 이사하여 느리골(현 효제동)이라는 동네에 집을 사서 있다가 동대문 가까이에 있는 마장안(현 마장동)이라는 동네에서 살았다. 그는 자기 집에 강당까지 마련하여 회장으로서 모방 신부를 한여름 동안 모시기도 하였다.

한편 구산에 살고 있던 두 형제는 박해가 일어나자 곧 잡혀 큰 동생이었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1841년 1월에 옥사하였고, 작은 동생은 사촌과 함께 광주에서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안토니우스는 아내를 잃고 다시 열심한 교우와 재혼하였다. 그러나 1840년 1월경 배교자가 밀고를 하여 잡힐 위험에 이르자, 그는 지방으로 도망가 숨어 지냈지만 오랫동안 포위망을 피할 수 없어 결국 온 가족과 함께 붙잡혀 포도청을 거쳐 형조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는 포장 앞에 끌려와 거듭되는 심문을 받았고, 30대의 곤장을 맞았으나 그는 조금도 굽히지 않을뿐더러 고문을 용감히 참아 나갔다. 안토니우스는 배교하라는 재판관의 독촉에 "나는 천주교인이오, 또 천주교인으로 죽고자 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 후 그는 다시 법정에 출두하여 곤장 60대를 맞았으나 그의 훌륭한 용기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 이튿날 밤에 당고개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니, 때는 1841년 4월 29일이요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안토니우스의 유해는 고향 귀산으로 옮겨다가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가족묘지 근처에 안장하였으나, 1927년 용산 신학교로 이장하여 신앙의 증거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 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경기도 광주 구산에서 부유한 외교인 가정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는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어 입교차기 전부터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천주교를 알게 되자 즉시 두 동생과 함께 입교하여 열렬한 신앙으로 친척과 이웃에게 전교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그 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도 중년에 이르러 입교하고 세상을 떠나자 김성우는 유방제 신부에게 직접 성세(세례) 성사를 받고는 서울로 이사하여 사신의 집에 공소를 만들어 신부들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김성우는 천주교인으로 밀고되었으나 미리 피신했었다. 고향 구산에 남아 있던 두 동생만이 체포되어 큰 동생 김덕심은 2년 후인 1841년 1월 28일 광주 옥에서 옥사했고, 작은 동생은 여러 해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러나 피신해 있던 김성우도 1840년 1월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김성우는 매우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나 참아냈다. 옥을 자기 집처럼 생각하며 외교인 죄수들에게 전교하고 그중 2명을 신앙으로 인도했다. 이렇게 옥중에서도 열렬한 신앙으로 무수한 고초를 견뎌낸 김성우는 옥중 생활 15개월 만인 1841년 4월 28일 마지막으로 치도곤 60도를 맞고 그 다음 날 47세를 일기로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영원히 천주교인으로 남기를 원했던 김성우는 경기도 광주 구산에서 태어났다. 삼형 제중 맏이인 그의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어 입교하기 전부터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천주교를 알게 되자 즉시 동생과 함께 입교하였고, 여러 친척과 이웃들에게 전교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 전체를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그후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김 안토니오는 유방제 신부에게 직접 성세성사를 받고 서울로 이사한 뒤 자신의 집에 공소를 마련하여 신부들을 모시며 생활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어 이곳 저곳으로 피신해 다니던 안토니오는 결국 1840년 1월경 가족들과 함께 붙잡혔다. 안토니오 포장 앞에 끌려와 거듭 신문을 받고 곤장을 맞으며 배교할 것을 독촉당했으나, 그는 "나는 천주교인이오. 또 천주교인으로 죽고자 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는 옥을 자기 집처럼 생각하며 외교인 죄수들에게 전교하여 주명을 신앙으로 선도했다. 이렇게 옥에서도 열절한 신앙으로 언도했다. 이렇게 옥에서도 열절한 신앙으로 무수한 고초를 견뎌낸 심성우 안토니오는 옥중생활 십오개월만인 1841년 4월 28일 마지막으로 치도곤 육십 도를 맞고 그 이튿날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마흔 아홉 살이었다. 구산에 복음을 전한 안토니오의 일가에는 모두 여섯 명의 순교자가 나왔다.